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는 1951년 12월 26일부터 1952년 10월 30일까지 320일 동안 유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및 미일 안보 조약 체결 이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반공 입법 추진, 미일 행정 협정 협상, 방위 체제 정비를 목표로 내각을 개조했다. 기무라 도쿠타로를 법무총재로, 오카자키 가쓰오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고, 자유당 내 권력 투쟁을 조절하기 위해 인사를 단행했다. 1952년 8월 28일에는 중의원 해산을 단행하고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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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일본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고 국제 사회에 복귀하도록 한 평화 조약이나, 전후 처리 과정의 이견과 냉전으로 일부 국가가 배제되었고 영토 및 배상 문제에 대한 모호한 조항들이 동아시아 분쟁 요소로 남아 대한민국이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1951년 일본 -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 요시다 시게루가 일본국 헌법 제68조에 따라 국무대신 임면권을 행사하여 단행한 최초의 내각 개조인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준비와 한국 전쟁 발발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응하고 민주자유당 내 파벌 갈등 해소 및 당내 융화를 도모하기 위해 단행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추진, 유엔군 군수 기지 역할 수행, 일본 경제 재건 발판 마련 등의 평가를 받는다.
1952년 일본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952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사회당 분열 속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며 장기 집권을 이끌었으나, 공산당 몰락, 야당 지지율 하락, 높은 기권율, 무소속 당선 등 정치적 혼란과 특징을 남겼다.
1952년 일본 - 제4차 요시다 내각 1952년 10월 30일부터 1953년 5월 21일까지 존속한 제4차 요시다 내각은 요시다 시게루 총리 휘하의 자유당 중심 내각으로, 각료 교체와 료쿠후카이 소속 인사 참여, 그리고 바카야로 해산과 같은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요시다 시게루 - 바카야로 해산 바카야로 해산은 1953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바카야로" 발언을 하여 촉발된 중의원 해산으로, 이는 당시 요시다 내각의 불안정과 자유당 내부 갈등을 심화시켜 불신임안 가결로 이어진 전후 일본 정치의 혼란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요시다 시게루 - 아소 다로 아소 다로는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아소 시멘트 사장을 역임하고 1979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여러 요직을 거쳐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현재 자유민주당 부총재 및 최고 고문이다.
1951년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연합국에 의한 점령 체제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일본 내에서는 점령 체제가 끝나면서 요시다 내각이 물러나고 요시다 총리도 사임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히지 않고 정권을 계속 이끌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요시다 자신이 오랫동안 '원맨 총리'로서 점령 체제를 극복해 왔다는 자신감과 권력욕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및 미일 안보 조약 발효와 새로운 체제 정비 (미일 행정 협정 협상, 국제 사회 복귀에 따른 외교 정책 수립, 점진적 방위 체제 정비, 공산주의 억제를 위한 노동운동 규제 등)를 실현하기 위해 정권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51년12월 19일, 요시다는 다음 해인 1952년이 지난 6년을 통틀어 중요한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1953년 1월 22일까지 정권을 맡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1951년12월 25일, 갑작스럽게 내각 개조를 단행하여 '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내각'이 성립되었다 (각료 인증은 26일). 요시다는 마스다 가네시치 간사장을 포함한 자유당 수뇌부와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개각을 추진했다.
'요시다 학교' 출신 이케다 하야토 대장상, 하시모토 료고 후생상, 사토 에이사쿠 우정상 겸 전기통신상, 스토 히데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을 유임시키고, 호리 시게루를 내각관방장관으로 기용하는 등,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하토야마 이치로 파에 대한 요시다 파의 정권 장악을 시도했다.
이러한 내각 개조에 대해 하토야마 파의 간부인 고노 이치로는 "터무니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셈이다"라고 비판했다.[1]
미일 행정 협정 체결 추진:오카자키 가쓰오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협상 작업을 진행했다.[1] 외교관 출신인 오카자키는 이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
방위 체제 정비: 오하시 다케오 국무대신 주도로 경찰예비대 강화 및 방위력 증강을 검토했다.[1]
반공 입법 추진:기무라 도쿠타로 법무총재 겸 법무대신 주도로 노동운동 규제 등 관련 법안 마련을 추진했다.[1] 기무라는 우익 성향의 검사 출신 정치인으로, 그의 기용은 반공 입법 추진을 예고했다.[2]
중의원 해산 및 총선거 실시 (1952년 8월): 요시다 총리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하토야마 이치로 파 등 반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4] 이는 '기습 해산'으로 불리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6. 평가 및 영향
요시다 시게루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체결 이후에도 정권 유지를 강력히 희망했다.[1] 이는 '원맨 재상'으로서 점령 체제를 극복해 왔다는 자부심과 권력욕뿐만 아니라, 조약 발효 후 새로운 체제 정비, 외교 정책 입안, 방위 체제 정비, 공산주의 억제를 위한 노동운동 규제 등의 과제 수행을 위한 것이었다.[1]
1951년 12월 25일, 요시다는 자유당 수뇌부와 상의 없이 내각 개조를 단행했다.[2] 이는 요시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주요 인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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